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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드라마 리뷰

봉오동 전투(2019) : 독립군의 첫 승리

by 혼자서도 잘 해영 2022.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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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2019)

감독 : 원신연

주연 : 유해진, 류준열, 조우진

 

봉오동 전투, 역사적 사실

일제의 무차별적인 학살과 탄압이 극에 달하자 의병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서 만주 일대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1910년, 국권을 피탈당하게 됩니다. 만주지역으로 이주한 의병들은 이름을 독립군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의지를 불태우게 됩니다. 1919년 3월 1일 전국에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지게 됩니다. 어제의 농민이 오늘의 독립군이 되어서 일제에 항거합니다. 일본군이 만주로 쳐 들어오지만 독립군을 놓치고 맙니다. 화풀이로 인근의 '삼둔자' 라는 마을을 습격을 합니다. 민간인들을 남녀노소 불문하고 무참히 학살을 합니다. 이때, 독립군이 나타나서 일본군을 섬멸해 버립니다. 이 사건이 봉오동 전투의 서막이 된 삼둔자 전투입니다. 복수를 위해 일본군은 월강 추격대라는 특수부대를 결성하여 독립군이 주둔하고 있는 봉오동 지역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당시, 홍범도 장군은 이화일 분대장에게 일부 병력을 주고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유인해 오라는 미션을 줍니다.  독립군은 봉오동 골짜기에 매복을 하게 됩니다. 월강 추격대를 포위망으로 완전히 끌어드리는 데 성공합니다.

홍범도 장군의 신호로 독립군들의 집중 포화가 쏟아지고,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독립 연합군의 포격으로 월강 추격대는 후퇴를 합니다. 일본군은 세 시간 동안 저항을 했지만 결국 견디지 못하고 퇴각을 하게 됩니다. 더욱이 급격한 기상 악화로 봉오동 골짜기는 폭우와 안개에 휩싸이게 됩니다. 피아 식별이 어려웠던 일본군들은 퇴각을 하다가 겁에 질려 서로에게 방아쇠를 당기기도 했습니다. 일본군은 157명 전사, 300여 명 부상, 총 45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독립군의 사상자는 채 10명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군무 도독부, 국민회군, 대한 독립군이 연합하여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가 봉오동 전투입니다.

영화 봉오동 전투 이야기

일본군의 공격으로 동생을 잃은 소녀 그리고 그 소녀를 농락하는 일본군들 그때, 총성 소리와 함께 등장한 독립군 분대장 이장하, 그의 신호에 맞춰 일제히 사격을 하는 독립군들, 정비되지 않은 일본군은 순식간에 초토화되고 어린 소녀를 구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도망가는 일본군을 쫓는 또 다른 독립군 황해철, 사격 솜씨는 엉망이지만 칼 잘 쓰기로 유명합니다. 이 들의 임무는 일본의 독립군 추격 본대를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추격 본대와 예상보다 빠른 선발대의 추적, 그렇게 목숨을 건 유인 작전이 시작됩니다. 당하는 척하며 아슬아슬하게 도망치면서 1차 유인 지역인 돌무덤에 도착한 장하와 독립군, 돌무덤에 숨겨둔 기관총으로 선발대를 초토화시킵니다. 

해철을 대신해 독립 자금을 운반하던 개똥과 춘희가 일본군에 붙잡힐 위기에 처합니다. 춘희와 개똥에게 붙은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장하가 일본군의 유인책이 되기로 합니다. 홀로 일본군을 버려진 민가로 유인한 장하는 미리 설치한 폭발물로 일본군을 저지해보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죽을 걸 알면서도 흔들림이 없는 이장하 분대장입니다.

이때 나타난 해철과 독립군은 결국엔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끌고 오는 데 성공합니다. 백인지 이백인지 알 수 없었던 독립군은 작전을 완수하기 위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홍범도를 필두로 하는 독립군 세력들이 봉오동 골짜기에 매복해 있다가 유인해 온 일본군들에게 총격전을 가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봉오동 골짜기까지 일본군을 끌고 오기 위해선 목숨을 건 독립군의 급박하고 위험한 과정을 묘사한 영화입니다. 

영화에서 가장 명장면인 유인에 성공한 후 골짜기에서 각각의 독립군 부대의 이름이 자막과 함께 등장하는 모습을 보고 소름이 돋고 전율을 느꼈습니다. 묵직한 감동이 있는 영화입니다. 

봉오동 전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잘 훈련된 군사, 최강의 무기, 풍족한 보급 등을 두루 갖춘 일본군에 비해 열악한 독립군들에게는 버거운 상대였습니다.

더불어 독립군의 가난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당시, 기회가 될 때마다 구비한 무기로 체계가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열세였던 독립군이 대승을 거둔 봉오동 전투, 나라 뺏긴 설움이 농민을 소총 잡은 독립군으로 만들었습니다. 출신지역도, 계층도, 활동 배경도 다 다른 일반 농민 출신의 독립군이 일본 정예 부대를 격파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이 어려운 일을 우리 독립군이 해냅니다. 나라를 향한 단결력이라는 독립군의 진짜 저력이 없었더라면 봉오동 전투가 가지는 의미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독립군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수를 잃고 졌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한 결과로 지형지물을 이용한 승리한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의 첫 승리이자 청산리 대첩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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